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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이야기 연구회

백작가에서 자라난 영국의 흑인 영애, 다이도 엘리자베스 벨 2편

by Tabby_Moon 2023. 11. 26.

 지난 편은 다이도의 출생 배경, 켄우드 하우스에서 자라게 된 경위와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번 편은 다이도를 다룬 실화 기반 영화 'BELLE (벨, 2013)'의 내용과 비교해 가면서 그의 인생 전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굉장한 스포가 될 예정이니 주의를 바란다.

 

 


 

 1. 아버지 존 린지의 영화와 현실

 

 맨스필드 백작에게 딸의 양육을 부탁하여 다이도가 켄우드 하우스에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장본인인 존 린지는 영화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고 자신의 성을 붙여 주었으며 다이도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겨 주었지만 현실은 영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다이도의 풀 네임 '다이도 엘리자베스 벨' 에서 이미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지만 다이도는 아버지의 성인 린지 대신 어머니의 성인 벨로 세례를 받았다. 흑인 혼혈아를 낳았다는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능하지만 린지의 네 명의 다른 백인 사생아들은 모두 린지라는 성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볼 때 참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린지가 다이도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이도의 어머니 마리아 벨까지 영국으로 데려와 자유인이 될 수 있게 한 것에 더해서 나중에 본인이 소유한 부동산까지 벨에게 양도했고, 애초에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맨스필드 백작에게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2. 린지의 유산을 받지 못하다

 

 다이도는 린지에게서 단 한 푼의 유산도 받지 못했다. 켄우드 하우스에서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해 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외삼촌 맨스필드 백작이 다이도에게 유산을 적당히 남겨 주리라고 생각했을까?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역사에 남은 사실은 천 파운드의 유산을 받은 사람은 부인 메리 밀너 외 다른 네 명의 사생아 중 두 명인 엘리자베스 린지와 존 린지 뿐이라는 것이다. [각주1]

 

 


 

3. 다이도와 엘리자베스 머레이

 

 영화에서는 린지가 다이도에게 엄청난 유산을 물려주었고, 그 덕분에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반면 엘리자베스의 상황은 훨씬 절망적이다. 자식이 없는 맨스필드 백작의 모든 재산과 작위를 받을 예정임에도 딸에게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지참금 없는 신부감이라는 페널티를 안고 결혼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만만치 않은 현실에 큰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어땠을까?

 

 

 실제로 엄청난 상속녀가 된 사람은 엘리자베스였다. 아버지는 맨스필드 백작의 전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을 사람인데다, (물론 영화와는 달리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재산을 물려주었다) 친척 어른인 맨스필드 백작과 결혼하지 않은 두 고모에게서 따로 받을 유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엘리자베스에게 상속된 유산은 총 4만 파운드. [각주2] 당시 상류층 가정에서 근무하는 가정부의 연봉이 20파운드에서 70파운드 정도였다는 것을 볼 때 이 액수는 굉장하다고 할 만했다. 

 

 다행히도 맨스필드 백작은 다이도에게도 500파운드와 100파운드의 연금을 남겼다. 원래는 연금 100파운드만을 주려고 했지만 "그 애가 어떻게 자라왔고 그 애를 부양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 고려할 때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하며 일시금 500파운드도 추가로 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각주3] 여기에 맨스필드 백작 부부의 말년에 함께 살면서 도움을 준 레이디 마저리 머레이(엘리자베스의 고모)에게서 받은 100파운드까지 더한다면 그래도 생활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켄우드를 떠난 다이도

 

 1785년 엘리자베스가 맨스필드 부인의 사촌인 조지 핀치 해튼과의 결혼으로 켄우드 하우스를 떠나고 8년 뒤, 다이도 역시 맨스필드 백작이 사망한 지 9개월 만에 결혼하여 켄우드 하우스를 떠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 당시 18세기 여성의 결혼 적령기를 생각해 볼 때 3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보호자 역할을 했던 맨스필드 부부가 모두 사망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독립이었다기보다는 앞으로의 생활을 위한 독립이었던 것 같다.

 

 

 남편인 장 루이 샤를 다비니에(영국식 이름은 존 다비니에)는 노르망디 듀시 출신의 프랑스인이자 남성 고용주의 개인 수행원 역할을 하는 하인이었다. [각주4] 하인이라고 말하면 머슴이나 노비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서양에서는 같은 하인이라도 하는 일과 연차 등에 따라 세세하게 계급을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느냐에 따라 경제 상황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었다. 재산 관리인으로 일한 적도 있었던 다비니에는 어느 정도 상급 고용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이도는 쌍둥이 아들 찰스와 존, 막내 아들 윌리엄 토마스를 낳고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이도의 묘지는 1970년대 까지 웨스트민스터의 세인트 조지 필드에 있었다가, 부지가 재개발되면서 이장되었다.

 

 

 


 

5. 이야기를 마치며

 

 이번 이야기를 포스팅하려 다이도에 대해서 조사하던 중 문득 다이도는 행복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주어진 여러 사회적인 제약과 차별이(그것이 흑인이라서였든, 사생아이기 때문이었든지 간에) 다이도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켄우드 생활과 결혼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인생은 한 두 편의 에세이나 요약 만으로는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다이도의 전체 인생이 대저택에 살고 비단 드레스를 입던 영애치고는 초라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가 불행했을 것이라 무심코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생각이 머리속에 떠오르기도 했지만, 초상화 속 다이도의 부드러운 미소와 장난기 있는 제스처를 다시 보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 그의 일생이 전부 아름다웠다고 할 수는 없어도 소소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런 날들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최초로 어떤 무언가가 되는 사람에게 고난과 역경이 따른다는 말을 자주 한다. 첫 번째로 가는 사람의 운명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처음은 힘들기 때문일까. 아무도 가 본적 없었던 '최초의 흑인 영애'라는 길을 걸었던 다이도가 행복했었기를 잠시나마 바란다.

 

 

 


 

각주

 

[1] 린지와 부인 메리 밀너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유언장에 적혀 있는 2명의 사생아인 엘리자베스 린지와 존 린지에게 재산이 상속되었다. "Slavery and Justice at Kenwood House, Part 1" (PDF)Historic England.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14 June 2015. Retrieved 12 June 2015.

 

[2] 맨스필드 백작에게서 만 파운드, 아버지에게서 7,000 파운드, 두 고모에게서 22,000파운드의 일시금과 천 파운드의 연금을 받았다. Trackman, Ian. "The Will and 19 Codicils of the 1st Earl of Mansfield, with particular reference to Dido Elizabeth Belle"

 

[3] “I think it right considering how she has been bred and how she has behaved to make a better provision for Dido" (레퍼런스는 위와 같음)

 

[4] 다비니에의 고용주 존 크라우퍼드가 자신의 유언장에 그를 자신의 발렛(Valet, 개인 수행원)이라고 언급했다. Murden, Sarah (10 July 2018). "Dido Elizabeth Belle and John Davinière, what became of them?". All Things Georgian. Retrieved 7 Jun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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